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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1차

10일 글쓰기

<1일차>

* 물고기

잘 모르겠다. 걔가 날 좋아해 주면 정말 기쁠 것 같은데 안 좋아해 줘도 좋을 것 같다. 걔랑 가끔 만나고 쓰잘 데 없는 이야기하고, 우리 동네 걸어다니고 하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막상 연애할 생각하면 귀찮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자기가 좋아하던 애가 자기 좋다 그러면 갑자기 싫어진다던데.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다. 나 좋다면 완전 땡큐지. 근데 그렇다고 나 안 좋아해 주면 막 죽을 것 같고 그렇진 않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데 나는 별로 간절하지도 않은가보다. 능력치가 골고루 다 떨어지면 간절하기라도 해야지, 그런 기본도 안 되어 있으면서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아, 그래. 그러니까 이게 문제다. 내가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걸 걔가 어떻게 알고 해주겠는가. 나도 매일 절실하게 하늘에 기도도 드려보고 싶고, 생일 케이크 촛불 끄면서 아니면 별똥별 떨어지는 거 보면서 소원도 빌어보고 싶고, 정말 밝은 보름달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싶은데, 그 문장 하나가 생각이 안 난다. 주어가 너인 건 확실한데 서술어가 없다. 네가, 뭘 어떻게?
휴대전화 창에 네 번호를 적었다 지웠다 적었다 지웠다 하는 중이다. 반 정도 적었다가 한숨 쉬고 지우고, 끝까지 적었다가 다이얼 버튼 누르기 직전에 지우고. 솔직히 네 번호 외울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너무 쉬워서 그냥 손에 익어버렸다. 그렇게 많이 전화할 것도 아니면서, 멍청하게. 번호를 반쯤 적었을 때부터 뜨기 시작하는, 정직하게 딱 세 글자로 저장된 네 이름이 보일 때마다 내가 조금 우스워질 뿐이다. 술 마신 거 맞다. 시간이 조금 늦은 것도 맞는데, 정신이 멀쩡하다. 차라리 확 취해버리는 게 나을 텐데. 가끔 라디오에서 술에 진탕 취해서 전 애인한테 전화했다가 다음 날 후회하는 사연 같은 거 들을 때마다 너무 부럽다. 아무 걱정, 생각, 염치, 수치심 없이 그냥 전화해버리고 싶은데 그러기엔 정신이 심각할 정도로 멀쩡하다. 아무튼 지금 내 생각은 그런 거다. 얘가 나한테, 뭐야, 너 술 마셨냐? 하고 싫은 티 팍팍 내면 어, 술 마셨어, 하고 핑계라도 댈 수 있는 거? 술 먹고 용기 내서 어쩌구 하는 소리는 다 헛소린 것 같다. 이유 없이 말 걸고, 전화하고, 보고싶다 말하고, 그 정도 용기는 항상 있다. 다만 그게 너한테 민폐일까봐 못 하는 거지. 네가 싫어할까봐 두려운 거고. 그러니까 결국 취해서 용기를 낸다는 건, 내가 민폐 끼치는 중이라는 사실을 어디까지 잊어버릴 수 있느냐의 문제인 거다.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까짓거 뭐 할 수도 있는 거지. 그 정도 사이도 안 되나? 통화 연결음이 세 번 정도 울릴 때까지 멍 때리고 있다가, 네 번째 신호가 갈 때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맞다. 그 정도 사이도 안 되지. 대충 안 받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건 전화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만 하는 거랑 진짜 안 받는 거랑은 다른 문제다. 끊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지금 끊어도 부재중 기록 남는다 생각하니까 지금 끊는 게 의미가 있나 싶고, 이왕 걸어버린 거 끝까지 버텨보자 싶고, 하고 있을 때 신호음이 끊겼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거기까지 듣고,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누르고, 배경화면이 나올 때까지 이전 버튼을 열심히 눌렀다. 안내는 매번 들었지만 음성사서함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어떤 원리인지도 모르고. 음성 메시지 남기는 건 삐삐 세대 때나 하던 거 아닌가? 아무튼 민망함을 덮기 위해 휴대전화를 저 구석으로 치우고, 술병을 치우고, 그릇들을 모아서 싱크대에 넣어 놓고,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나와서 설거지하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좋아, 아무 일 없던 듯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된다. 그럼그럼. 눈 감고 얼마 안 지나서 휴대 전화가 엄청 징징거리길래 집어 들었는데 화면에 네 이름이 떠 있었다. 놀라서 욕할 뻔했다. 세 번 정도 진동이 울릴 때까지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아, 내가 바라던 게 이건가? 네가, 날 어항에 넣어줬으면 좋겠다. 진짜 미친 게 분명하다. 어디 가서 말했다가는 바로 욕 얻어먹을 소리다.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나. 어쨌든 밥을 주니까 나는 잘 받아먹을 것이다. 열심히 먹어서 제일 큰 물고기가 되겠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 2일차 >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다. 삼 년이 지난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섣불리 확신해서는 안 되는 거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확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기 먼 데로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너를 그냥 보내줬겠지. 처음 일 년 동안은 계속 연락이 닿았다. 솔직히 요즘 같은 세상에 멀리 떨어지는 게 대수인가? 인터넷 창 하나만 열면 다 연결되어 있는데. 나도 그런 믿음이 있었으니까 별 고민 안 하고 흔쾌히 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옆에 있을 때처럼 매일 자기 전에 안부 전화도 하고, 찍은 사진들 서로 공유하면서 웃고, 밥 잘 먹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하고. 그러다 딱히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점점 전화하는 횟수가 줄었고, 답장을 확인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듬해 겨울, 앞으로 바쁠 것 같아서 휴대 전화를 잘 안 쓰게 될 것 같다, 그런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알겠다고 했는데, 그 후로 전화는 한 번도 안 해, 연락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줄어들더니 한 달 전부터는 아예 아무 말도 없다. ‘잘 안 쓴다’고 한다면, 그 몇 번 안 되는 ‘쓴다’의 경우 중에 당연히 애인인 내가 포함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하다가 괜한 오기가 생겨 버텨보고, 그러다가 시기를 놓치니까 이제는 내가 말걸기조차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건 그거다. 그래도 내가 살 만하다는 거. 이쯤 됐으면 네가 너무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걱정도 하고, 아무튼 안달이 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나는 애인이 있고, 그게 너고, 너는 지금 저기 멀리 타지에 가 있다. 그래서 그게 뭐? 딱 거기까지가 전부다. 이게 말이 되나. 누구보다 감정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할 부분에서 제일 객관적인 사실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아무래도 끝난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너에게 필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네 인생에 굴러 들어간 나 때문에 네 계획이 바뀐다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너는 항상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 내가 반대했어도 가기로 결정한 이상 끝내 가고 말았을 것이다. 나 때문에 마음은 조금 불편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걸림돌인 것이다. 네 인생에 있으면 곤란하고, 없으면 더 좋은 걸림돌. 아, 아니. 실은 전부 내 핑계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그냥 마음이 멀어진 것뿐이다.
헤어지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이대로 잠수 타면 되는 건가? 원래 연락도 안 하는 상대인데? 그래도 말 한 마디라도 남겨야하지 않을까 싶어 머리를 굴려보니, 떠오른 게 이메일이었다. 편지와 메신저 중간 어디쯤 위치한, 교수님한테 문의 넣을 때나 쓰던 그거. 편의점에서 산 맥주 캔을 하나 따 옆에 두고, 컴퓨터 전원을 켰다. 마지막으로 쓴지 몇 년도 더 된 계정이라 비밀번호를 세 번 틀리고 나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메일 쓰기를 눌러야 되는데 무심코 받은 메일함을 눌러놓고서 온갖 스팸 메일 목록이 주르륵 뜨자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아, 그런데 뒤로가기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사이사이에 네 것일 게 분명한 메일이 끼어 있더라. 그것도 수십 통은 되어 보이는 게, 일주일 간격으로, 바로 어제 것까지. 놀랍게도 기쁘지도 않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읽고 싶지도 않았다. 왜 내가 읽지도 않았다는 걸 알면서 굳이 계속 메일로? 이유를 생각해 볼 수도, 이해해 볼 수도,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 거기서 이미 결론은 나와 있는 것이었다. 결국엔 상황이 감정을 만드는 게 아니라, 감정이 변명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는 쓰레기다. 더 쓰레기 같은 건 내가 쓰레기라는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맥주 캔을 기울여 단숨에 다 들이켰다. 씁쓸한 탄산이 코끝을 찔렀다.

< 3일차 >

* 자각

홀려버렸다. 홀려도 아주 단단히 홀렸다. 쟤는 한국 여우인가? 일본 너구리인가? 아니면 뭐 서양 마법사? 아무튼, 누구든 작정하고 사람을 꾀어내려 해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낚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타공인 금사빠인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여태 잠깐 발만 넣었다 빼는 식의 방식을 고수해왔는데, 하룻밤 사이에 다 와장창 무너져버린 것이다. 메이저리그 4번 타자한테 야구 방망이를 들려주고 일부러 무너뜨려보라 시켜도 절대 무너질 일 없는, 나름 난공불락의 최종 방어선이었는데. 그 왜, 나그네 두고 해랑 바람이랑 내기하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강제로가 아니라, 관련 없는 것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성공하는 것이다. 아, 그니까, 쟤는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인데 난 왜 홀렸냐고. 쟤는 공을 땅바닥에다 내팽개쳤는데 왜 그게 내 심장 한가운데에 맞았냐고. 머릿속에선 계속 뎅뎅 종이 울리고, 한 문장만 반복해서 떠오른다. ‘님 이제 망했음ㅋ’ 이 치사한 뇌 자식이 날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서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놀려먹는 중인 게 틀림없다. 내가 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좋아해 왔어도 이 정도까지 홀린 적은 없어서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둘째, 쟤는 나한테 절대로, 네버에버, 아무런 마음이 없다는 거. 왜냐하면 쟤는, 아주, 잘난 놈이니까!
이건 다 쟤 잘못이다. 그러게 왜 먼저 말을 걸고 난리야. 워낙 유명한 애니까 대충 얼굴이랑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초면에 사람 좋게 인사하면서 내 이름 물어보고, 앞으로 잘 지내자고 말했을 때 당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거기까진 뭐 그렇다 치는데 밥 먹었냐, 숙제는 했냐, 학교는 어디 갈 거냐, 저거 뭐냐,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걸 매일 물어본다? 게다가 성 빼고 이름만 부른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죽으라는 건가? 금사빠니까 말 걸지 말라고 써 붙이고 다녀야 되나? 매일 그러니까 세뇌라도 당한 건지, 쟤는 머리도 좋고 운동신경도 좋은 게 이제 하루하루 더 잘생겨져 가는 것 같다. 그래, 지금 여기쯤 읽으면서 욕하고 있을 거 안다. 그래서 미리 말하지 않았나,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고. 잘생긴 사람이 친절하면 그건 죄다. 그럼 잘생긴 사람은 나쁘게 행동해야 하냐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나쁜 사람은 잘생겨도 못생겨 보이기 때문에 논외다. 그니까 친절하지 말라는 말은 알아서 착하게 잘 살란 얘기고, 쓸데없는 오지랖 부려서 스치는 사람마다 다 홀리고 다니지 말란 얘기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난 잘생기지 않았으니까 친절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누가 복도에 학습지를 질질 흘리고 다니길래 다 줍고 나서 저 앞에 걸어가는 사람을 불러세웠다. 근데 그러고 나서 학습지를 쳐다보니까 쟤 이름이 적혀 있네.
“고마워!”
망했다. 아주 시원하게 인생 말아먹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고마우면 그냥 고맙다고 할 것이지 왜 눈웃음을 짓냔 말이다. 아니, 아니아니. 고작 고맙다는 말에 심장이 롤러코스터 타고 있는 내가 문제인 거지, 그게 뭐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쟤한테 홀려버렸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 4일차 >

* 전할 수 없는

너는 마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불쌍해서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비록 그게 썩은 동아줄일지라도─인 것 같았다.
내 또래 애들이 다 그렇듯, 우리 반 애들도 서로 뻔한 얘기들을 나누며 친해졌다. 음담패설, 컴퓨터 게임, 허세와 자기자랑, 뭐 그런 거. 공감대가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무리에서 한 발 멀어져 있는 게 나였다면, 너는 적당히 맞장구쳐주면서도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면서 한 발씩 멀어져 갔던, 그런 아이였다.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주된 무리들의 안중에도 없었던 거고, 너는 그 무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모든 아이들이 인정하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웃긴 일이다. 더러운 이야기에서 혼자 빠져나가려는 너를 비겁하다고, 재수 없다고 욕할 만도 한데, 그러기엔 너는 정말로, 너무 순수했다. 특별한 게 없어도 모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우라가 넘치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존재였던 너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그런 것들로 점철된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걸,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9월 모의고사 점수를 말 그대로 개떡같이 받고 나서, 성적표를 보다가 괜히 울음이 터진 나를, 화장실까지 데려가서, 품에 안고, 토닥여주던 너였다. 구원이라는 말을 다들 실감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순간에 그 의미를 깨달아 버렸던 것이다. 마치 절실한 신자에게 신께서 계시를 내려주시듯, 그 순간 분명하게 느꼈다. 아, 얘가 내 구원이구나. 힘들 때 곁에 남아 있는 게 진정한 친구라는데, 얘가 그 사람이구나. 분에 넘치게 고마운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번져가는 건 순식간이다. 기뻤는데. 내 구원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서 기뻤는데.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뭐였을까.
몇 년 전이었더라,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다 해서 오랜만에 TV를 켜놓고 온 가족이 같이 보고 있었다. 한마디 할 때마다 내가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반응하니까 아버지가 너는 왜 사내자식이 되어가지고 남자 아이돌을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들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면서. 그게 왜, 뭐 이상해? 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좀, 그렇잖아. 라고 대답했다. 그때, 우리 집은 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이후로도 부모님은 TV에서 동성애자 관련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쟤는 부모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그렇다,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텐데 안타깝다, 그런 얘기를 중얼거리곤 했다. 딱히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런 사람 여기 있는데.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나를 그대로 이해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그게 너여서 더욱 말할 수가 없다. 아무리 너라도, 거기까진 이해해도, 내가 좋아하는 게 너라고 말한다면, 도망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을 내 손으로 끊어버리는 건 아닐까. 오늘 청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 때, 교무실 같이 다녀오자고 할 때, 같이 게임이나 하러 가자고 할 때마다 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하는 걸 볼 때. 그럴 때마다 내가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계속 아려온다. 나도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을 뿐인데. 의도한 게 아닌데. 해서는 안 될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내가 여자였다면, 하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여자였다면 남자가 되고 싶었겠지. 너랑 친구라도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결국엔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떤 가정세계든 그 안엔 너를 좋아하는 내가 있고, 그걸 말할 수 없는 내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오늘도 아무것도 모르고 활짝 웃으며 내 목에 팔을 두르는 너한테 미안해하면서, 언젠가 내가 떨어져 다치게 될지라도, 하얀 동아줄에 매달리고 마는 것이다.

< 5일차 >

* 아름다운 이별?

“손 좀 줘 봐.”
“손은 왜.”
“그냥.”
내가 내민 왼손을 너는 조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잡혀 있지 않은 오른손으로 아메리카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런대.
“음... 손금을 보니까, 넌 나랑 같이 살 팔자는 아닌가 봐.”
“뭐라는 거야, 뜬금없이.”
쏘아붙이는 듯한 내 말에 너는 내 손을 쥐고, 내려다보고, 좀 우물쭈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날까.”
“엉?”
잘못 들었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지금 그게 손잡고 할 소린가?
“그냥, 우리 좀... 원래 성향도 다르잖아.”
“우리 삼 년 만났는데 지금 그런 소릴 해?”
“그, 원래 A형이 B형 만나면 좀 안 좋다고도 하고.”
“얼씨구. 초딩이냐?”
“아니, 그, 우리... 별자리도 상성이 잘 안 맞는다고 그랬잖아.”
“가지가지 한다. 왜, 넌 태양인이고 난 소음인이라서 안 된다고 하지?”
“어... 그것도 그렇네.”
“그렇기는 무슨. 너 원래 유사과학이라면 치를 떠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말해. 뭐, 다른 사람이라도 생겼냐? 나 먼저 정리하고 오라디?”
“아니, 그건 진짜 아니야.”
아니기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낀 채로 너를 노려봤다. 어디, 무슨 변명을 하나 들어나 보자. 너는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이직을 고민할 때 빼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화내지 말고 일단 들어봐. 음, 어... 먼 훗날의 나를 내가 믿을 수가 없어. 지금의 나는 네가 너무 좋은데, 과연 나중의 나도 그럴까? 만약에 내가 너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헤어진다면, 너랑 즐거웠던 일들까지 다 나쁘게만 기억될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게... 두려워.”
조용히 네 말을 들으면서 커피잔을 기울였다. 너는 내 눈치를 조금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좋은 기억만 남아 있을 때 이대로 마무리하고 싶어. 물론 나도 그냥 계속 이렇게 너랑 있고 싶지만, 영원할 거라고 나도 믿고 싶지만, 솔직히, 너도 알잖아. 그럴 수는 없다는 거. 우리,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맞는 말이었다. 너무 잘 아는 사실이었고. 내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단지 내가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얘랑 결혼까지 갈 건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애써 상상해보려 해도 그런 모습은 절대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 뭐 언젠가는 끝내야 할 사이인 거지. 더 나이 먹기 전에 빨리 정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걸 네가 먼저 깨닫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다. 그래도 뭐? 좋은 추억? 그런 생각하고 있었으면 의논을 하든가, 갑자기 손금이 혈액형이 안 맞네, 뭐네 하더니 일방적으로 통보하고서는, 우리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자?
“그러든가.”
“어?”
“네 말 하나도 틀린 거 없으니까, 그만 만나자고.”
“...역시 이해해주는구나. 고마워.”
고맙단다, 참나. 이건 싸움도 뭣도 아니고 그냥 끝난 거다. 삼 년 동안 크게 싸워본 적도 없어서 헤어졌다 붙었다 하는 상황이 어떤 건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얘기는 확실히 그런 게 아니다. 어차피 이런 이유로 헤어지는 거라면 다시 만나봤자 똑같은 이유로 헤어질 게 뻔하다. 또 나중이 두렵니 뭐니 하겠지. 소심한 자식. 그래도 씨, 만난 게 삼 년인데.
“뭐 해, 안 가고.”
“어?”
“거기 계속 앉아 있을 거야?”
“그... 어, 데려다주고 가려 했는데.”
지지리 궁상.
“좋은 추억으로 만드시겠다면서요. 너 여기 더 있으면 험한 꼴 볼 거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라.”
어리버리하며 어, 어... 하고 대답한 너는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돼서야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천장을 쳐다봤다. 뒷목이 조금 댕겼다. 너는 다른 건 몰라도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네가 느낀 감정들은 아까 네가 말한 그대로였을 것이고,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 핑계도 아니고, 다른 이유도 없다는 것. 그게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래, 뭐 머리로는 네 논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근데 마음으로는 절대 이해 못 하겠다. 말이 되냐? 누굴 만나도 끝이 두려울 텐데, 그럼 연애는 대체 어떻게 한대? 그래놓고 나중에 다른 누군갈 만난다는 소리라도 들려오면 정말 어이가 없을 것 같다. 아, 생각만 해도 열 받네.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지금부터 한강 어귀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 가볍게 달리고, 집 가서 씻으면 좀 마음이 상쾌해지겠지. 벌떡 일어나 커피잔을 카운터에 갖다 주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가방 속에 든 네가 선물해준 지갑이 보이는데, 갑자기 서러워졌다. 집에 네가 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그래도 삼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게 이렇게 하루 만에 정리될 수 있는 관계였고, 내가 지금 여길 혼자 나서야 한다는 게, 자기 혼자 단정 짓고 이미 결론 내버린 상태로 나한테 말했다는 게, 너무 서럽고 억울하고 화나고 비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초등학교 입학한 후로 울어본 적이 없는데. 가방을 낚아채고 이를 악물며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좋은 추억은 개뿔. 너는 내가 앞으로 가는 모든 술자리마다 엄청 씹어줄 테니 두고 봐라, 이 해삼 말미잘 같은 자식아.

< 6일차 >

* 주접

아 어떡하지. 진짜 너무 귀엽다. 그냥 답장 오는 것 자체가 귀여운데 내용은 더 귀엽다. 내 말에 대답해 주려고 하는 것도 귀엽고, 같이 고민해 주는 것도 귀엽고, 뜬금없이 다른 거 물어보는 것도 귀엽다. 간혹 보내는 ㅋㅋㅋ나 ㅜ같은 것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이러이러해서 늦게 봤다고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것도 귀엽고, 자기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면서 책상 위 문제집을 찍어서 보내는 것도 귀엽다. 가로로 긴 자판 때문에 맨날 오타 나서 해를 햐로 쓰고, 엔터 치다가 마지막에 ‘ㅔ’자가 붙어 오는 것도 귀엽고, 그걸 가만히 앉아서 타자 치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까 더 귀엽다. 프로필 사진도 귀여운데 그 사진도 나름 잘 나왔다고 생각해서 뿌듯해하며 올렸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귀엽다. 사실 이걸 다 네가 했기 때문에 귀여운 거지. 네가 아닌 사람이 똑같은 행동해봤자 아무 생각도 안 들었을 것이다. 이 지경까지 왔다면 이미 글러 먹었다는 거 아는데, 대상이 너라면 별의별 거 다 골라내면서 귀엽다고 난리 치고 있을 나라는 거 아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귀여운 걸 생각하면 내 기분도 좋아지니까 마음껏 귀여워하기로 했다.
어떻게 다 귀엽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한 건지, 놀라울 따름이다. 귀엽다 - 사전적 의미는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 라는데. 헐. 처음 알았다. 보통 뭐랄까, 작고 오밀조밀한 그런 걸 가리킬 때 쓰는 느낌? 어, 밑에 다른 연관 단어도 나오는데. 귀엽디귀엽다 - 더할 나위 없이 귀엽다라는 뜻이라네. 이거 딱 네 얘기인 듯. 귀엽디귀엽다. 흠, 뭐랄까. 귀엽다는 말은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정말 넓은 것 같다. 그냥 얼굴이나 외형이 귀여울 수도 있고, 말투나 행동이 귀여울 수도 있고, 생각이 귀엽다는 말도 썼던 것 같은데. 엄청 완벽할 것 같은 애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조그만 실수를 하면 그게 또 그렇게 귀엽고, 반대로 엄청 완벽해도 완벽하려고 애썼을 거 생각하면 귀엽고. 진짜 노는 거 좋아할 것 같은 애가 가만히 앉아서 영어 단어 외우고 있는 거 보면 너무 귀엽고. 거기다 막대사탕 같은 거라도 하나 물고 있으면 정말 더 말할 것도 없이 귀엽다. 오늘 귀엽다는 말 진짜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갑자기 귀엽다가 왜 귀엽다지? 왜 기엽다나 귀업다가 아닌 거지? 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 때까지 계속 쓸 것이다.
네가 보낸 내일 보자는 말을 계속 곱씹다 보니까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저번 주에 입었던 후드도 귀여웠는데, 내일은 무슨 옷을 입고 오려나. 내가 귀엽다고 하면 너는 히, 고마워, 하고 장난치듯 웃어 보인다. 그게 속으로는 삼백 번쯤 귀엽다고 생각하고 나서 겨우 한 번 꺼낸 말이라는 걸 알까.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전부 귀엽지만 암만 그래도 가장 사랑스러운 건 역시, 활짝 웃는 네 모습. 그걸 항상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매일 감사할 따름이다. 아 잠시만. 이거 적는 동안 다시 연락이 왔는데, 지금 전화해도 괜찮아? 라는데. 아 어떡하지. 진짜 너무 귀엽다.

< 7일차 >

* 연락의 의미

며칠 전부터 계속 연락이 온다. 아, 계속 온다기보다는 끊기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SNS 친구 신청이 왔길래, 아는 이름이라 그냥 받아줬다. 그리고 한 삼 일 지났나? 갑자기 그 SNS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아 진짜 웃긴 게 평소 같으면 대충 놔뒀다가 확인했을 텐데 그때 마침 웹툰을 보고 있어서, 화면을 내리다가 바로 메신저 창을 눌러 버렸다. 이미 읽었는데 답장 안 하기도 좀 그렇고 해서 의도치 않게 칼답을 하게 돼버린 거. 시작은 간단히 그런 내용이었다. 너 영진고 이윤희 맞아? 그래서 맞다고 했다. 얘는 그러니까 음, 별로 친하진 않았고 같은 반 한 번 했나? 아무튼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랑 딱 이름 석 자만 기억나는 그런 애다. 얼굴은 물론이고 키나 덩치 같은 것도 좀 가물가물하다. 학교 졸업한 지 워낙 오래돼서 뭐 그럭저럭 반갑기도 하고, 안부 묻는 겸해서 대충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근데 또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좋아하는 배우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내가 SNS를 이 배우로 도배해 놓긴 했으니 알아내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겠구나. 아무튼. 적당히 일상적인 얘기하다가 할 얘기 떨어지면 배우 얘기 꺼내고. 오늘 인스타 사진 올라왔더라? 팬미팅한다면서? 오랜만에 그 드라마 다시 봤는데 연기 잘하긴 하더라. 뭐 그런 거. 내가 별로 대답할 말 없게 짧게 끊어 대답해도, 일부러 내 관심사를 끌어오면서 대화를 안 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뭐하자는 건지 모르니까 계속 대답해 주고 있는 거지, 의도가 빤히 보였으면 바로 읽씹을 하건, 안읽씹을 하건 했을 것이다.
연락이라는 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학생 때야 뭐 다들 매일같이 얼굴 보니까 굳이 따로 연락 같은 거 하지 않았지만, 졸업하고 나니까 연락이 닿아있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 되었다. 안 그럼 그냥 그대로 연 뚝 끊기고 서로 볼 일이 없다. 학창시절의 나는 그런 연락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오는 연락에는 진짜 매번 칼답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봤자 윤희야 너 오늘 지각비 안냈어ㅜ, 윤희야 숙제 오늘까지 제출인데 안 줬네, 윤희야 너 청소 안 하고 갔다고 담임쌤이 불러오라 하시는데? 이 정도 정보 알림 내용뿐. 그때마다 나는 헐 미안, 깜빡했다. 헐 미안, 깜빡했다. 헐 미안, 깜빡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치만 졸업하고 나서도 얼굴 보는 애들이랑은 연락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까, 굳이 칼답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바로 대답하기가 좀 부담스럽고, 상대한테도 부담 주는 것 같아서 적당히 텀을 두고 대답하는, 그런 식이다. 아 이야기가 좀 샜는데, 아무튼. 연락을 계속 잇는다는 건 언젠가 볼 걸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고, 그렇다면 거기에 숨은 의도가 무엇이냐, 는 게 지금 내 의문이다. 근데 뭐 굳이 불편한 얘기까지는 안 꺼내는 것 같길래, 나도 괜히 관심 있는 것처럼 안 보이게, 철저히 개인적 질문 하나도 안 물어보면서 나름 잘 대답해왔다.
올 것이 왔다. 내 배우님 나오는 영화 같이 보러 가잔다. 이 고전스러운 전개 어떡하면 좋지. 개봉 확정된 지 얼마 안 된 영화라, 이미 다른 친구랑 보기로 했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다른 핑계 대기엔 내가 아주 한가하다는 걸 얘가 잘 알기 때문에 그것도 좀 그렇다. 와중에 또 거짓말까지 해가며 거절하는 건 양심에 찔려 잘 못하는 성격이다. 졸업한지도 꽤 됐고, 갑자기 연락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진짜 수상한데. 갔더니 막 신천지라서 나 포교하러 온 거면 어떡하지? 내가 호구처럼 보여서 옥장판 같은 거 팔러 온 거면 어떡하지?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런 상황까지 걱정해야 돼? 나 떳떳하게 잘 살아왔는데, 억울하네. 그래, 까짓거 보러 가자! 가 보면 알겠지, 뭐. 사이비나 다단계면 손절하고, 아니면 그냥 적당히 친하게 지내고. 내 배우 영화나 종종 같이 보면서. 한 세 시간쯤 뒤에 그래, 그러자, 하고 답장을 보냈다. 아,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피곤해진다.

< 8일차 >

* 너만 있으면 돼

분명 나는 사실만을 말했다. 안 믿은 것도 헛소리하는 것도 다 쟤네들이지. 나도 처음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숨기고 싶어 하는 애들처럼, 딱히 그럴 이유는 없어도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런데 연애 시작하고 나니까 자랑하고 싶어 미치겠다. 이것 좀 봐라, 여기 세상 최고 사랑스러운 애가 내 애인이다!!! 아니, 근데 말하고 나면 듣는 애들 반응이 항상 떨떠름하다. 잠깐 멈칫하더니 장난치지 말라 그러고, 오늘 만우절 아니다, 그러고. 아이고, 좋으시겠어요, 하고 비웃는다. 이것들이 왜 안 믿어주는 거지. 내 연애가 무슨 초등학생 때 옆에 있는 친한 애 괜히 데려다가 자기야! 하고 부르는 장난쯤 되는 줄 아나 보다. 더 가관인 건, 내가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진짜 진지하다고 얘기할 때 돌아오는 이런 반응이다. 뭐, 원래 그 나이대는 잠깐 흔들리고 그러는데, 나중엔 다시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참나. 돌아가긴, 어디로 돌아가는데?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 그래봤자 나이 한두 살 더 먹은 게 다인 사람들이 그런 소릴 참 자랑스럽게도 지껄인다. 자꾸 나더러 그런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데, 그런 자기들은 얼마나 대단한 연애를 한다고. 클럽인지 헌팅포차인지에서 만났다면서 일주일마다 상대가 바뀌거나, 자기한테 너무 잘해준다고 자랑하더니 알고보니 세 다리 걸치던 인간이었거나. 아니면 어디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을 데려와가지고 너무 잘생겼다고 역겨운 소리(이런 말 하는 건 예의 아닌 거 나도 아는데 먼저 예의 걷어찬 건 저쪽이고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난 상태니까 이 정도는 양해해달라)나 하고, 술 먹고 전남친이 어쩌구하면서 질질 짜는 게 행복한가? 맞아, 그렇게 말하는 애들도 있었다. 시야를 좀 넓히라고, 주위에 멀쩡한 사람들 많다고. 자기가 남자 소개시켜 줄 테니까 여자 그만 만나라고. 미친 건가? 바로 그 자리 박차고 나왔고, 걔들이랑은 연 끊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군대 간 남친 기다리고 앉아있냐고, 내가 소개시켜준다하면 자기들도 화낼 거면서. 내가 여자 만나는 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이냐? 내가 걜 좋아하고, 걔가 날 좋아할 뿐인데,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가? 내 애인이 자기들 애인이랑 비교되게 독보적으로 예뻐서 배알이 꼴리면 아, 그렇구나, 하고 화제를 전환하든가. 내가 뭐 응원해달라 했니? 너무 큰 걸 바라는 거야?
어제도 똑같은 말을 듣고 와서, 나 아무래도 잘못 산 것 같아. 주변에 왜 제대로 된 친구 하나가 없냐. 하고 수십 분째 쏟아내는 푸념을, 너는 똘망똘망한 눈을 하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넌 이런 얘기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 나 신경 쓸 것 없이 막 욕해도 괜찮아, 어차피 그런 애들은 친구도 아니야.”
다 말하고 나니까, 괜히 얘기해서 너한테까지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싶어서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나 좀 봐봐.”
너는 그렇게 말하더니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들어 내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짠.”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너는 손가락을 떼며 살짝 웃었다.
“네가 좋고 내가 좋으면 된 거지. 안 그래? 난 너한테만 자랑스러운 사람이면 되는데.”
아, 지금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몰라,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은 신경 안 쓸란다. 너랑 나만 있어도 차고 넘친다, 내 세계는.

< 9일차 >

* 전할 수 없는 2

억울하다. 내가 훨씬 먼저인데. 물론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왜 나를 안 좋아해 주냐는 그런 억지를 부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널 좋아한 건 분명 내가 먼저인데 이제는 널 좋아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게 억울할 뿐이다. 같은 소리 아니냐고? 아니, 전혀 아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것과 네가 날 좋아하는 건 명백히 다른 문제다. 그래서 얌전히 좋아하고만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애인을 데리고 나타나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러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게 아닌데, 이런 마음이 너한테 애인이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는데. 졸지에 임자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몰라, 일단 얌전히 구석에 찌그러져 있긴 한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좋아. 내 인생관에 부합하는지 보자. 무슨 일이 있어도 범법과 범죄 행위는 하지 않는다, 는 게 내 인생 1원칙이다. 애인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죄인가? 일단 그런 조항은 우리나라 법에는 없는 것 같다. 오케이, 패스. 그럼 내가 지금 죄책감 느껴야 하는 이유는? 윤리적 도리에 어긋나서. 대외적으로 알려졌다가는 욕 한 바가지로 얻어먹을 만한 일이라서. 정말 통탄할 일이다. 세상 누구도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널 좋아할 순 없을 텐데. 너에게 공식적으로 애정을 줄 수 있는 자리는 한 자리고, 그 자리는 공석이 아니라서, 나한텐 그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 막말로 그렇게 누굴 만났으면 행복하게 잘 지내든가. 프로필 사진에 서로 찍어 준 사진 올려놨다가 이틀도 안 돼서 내리고, 서로 저격글 올리고, 싸우다가 다시 만나고. 또 싸우고. 그럴 거면 대체 왜 만나는 거냔 말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지만 그 과정에서 네가 상처받을까봐, 그게 자꾸 걱정돼서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그것보단 잘해 줄 자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둘 사이에 직접 끼어들어서 ‘너 고생시키는 그런 애 말고 나랑 만나자! 내가 잘해줄게!’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인생은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데. 이 거지 같음을 나 말고 누가 이해해주겠냔 말이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누가 봐도 내가 제일 나쁜 놈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고백 한 번 안 해보고 이제와서 웬 신세한탄이냐고 하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동안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이었나 생각해보면, 어차피 너랑 만나는 건 가능성 제로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고, 최소한 고백이라도 해보는 거? 그냥 이만큼 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넌 언제나 누군가에겐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근데 그런 말이 쉽게 나오냔 말이다. 너무 서두르면 가벼워 보이고, 너무 진지해도 부담스러울 거고. 그러는 동안 일이 벌어진 거고, 나는 이제 고백조차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지울 수가 없는데, 그 마음이 향해야 할 목적지가 없어졌다. 두둥실. 방향키를 잃은 배가 되어버렸다. 너는 여전히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를 좋은 친구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순풍이 불어서 항해를 계속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말이다. 떠 있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우에 난파하거나, 제 무게를 못 이겨 서서히 가라앉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이 바다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항해는 시작된 지 오래니까.

< 10일차 >

* 옛 기억

꿈을 꾸었다. 눈을 뜨고 나니 가슴을 에는 듯한 느낌만이 남아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던, 울면서 꿈에서 깨어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네가 내 곁에 있었다. 얼굴조차 희미해져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데,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그게 너라는 확신은 있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데, 그럼 나는 아직 네가 내 곁에 있길 바라는 것일까. 이쯤 되면 생각나는 이야기.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니요, 행복한 꿈이었습니다. 그럼 왜 우느냐. 왜냐하면 그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나쯤 품고 있을 예전 모습에 대한 그리움. 그게 나한테는 너인 거고. 바꿔 말하면,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너 자체에 대한 그리움도 분명 안고 있겠지만, 결국엔 그 시절의 내 모습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상대방의 배경도, 가치관도, 미래도, 그 어떤 것도 고민해보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절. 한 번 빠져버리면 그냥 그대로, 순수하게 그 사람을 내 우선순위에 둘 수 있었던. 이제와서는 불가능해진 나의 그런 어렸던 모습들. 순수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이것저것 재보고, 따져보고, 검열하고, 거르게 된다. 무조건적 사랑은,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알아버린 이상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것이다. 그저 온 세상이 그 아이로 가득했고, 내가 그 아이한테 어떻게 보일지, 혹시 날 싫어하는 건 아닐지, 그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던. 그런 시간들이 그리워지고 마는 것이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러나 모든 옛것들이 그러하듯, 너 또한 내 추억 속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울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굳이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찾아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그때의 우리를 너도 가끔 그리는지, 네 꿈속에도 내가 가끔 나타난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런 것들이 조금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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