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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1차

네가 주인공인 나의 이야기

  * 짝사랑


  “좋아했어.”

  과거형은 언제나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무언가 해보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단 뜻이니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분명 처음엔 아니었는데. 내게 처음 말을 걸어준 게 너였고, 그 뒤로 종종 너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취향이 꽤 잘 맞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친해진 우리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자연스러운 전개 속에서 나만이 자연스러울 수 없게 된 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던 것 같다. 좋아하는 건가, 하고. 재밌는 건 한 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네 모든 게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동그란 눈이 예뻤고, 같은 것을 말하는 목소리가 예뻤고, 날 돌아보는 그 향기가 예뻤다. 네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떠서, 너와 함께 있는 순간 그 자체가 점점 좋아졌다. 그렇다고 이런 나를 너에게 전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용기가 없어서, 도 물론 맞겠지만 더 큰 이유는 그동안 몇 번을 혼자 앓고 혼자 포기하면서 내 안엔 혼자 앓고도 차고 넘치는 사랑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그 정도 빈 공간은 내 사랑으로 채울 수 있어. 지금은 그냥 이렇게,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래서 네가 처음 그 아이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유독 그 아이에 대해 말할 때 더 부드러워지는 목소리, 더 맑아지는 눈빛, 얼굴에 은은하게 번지는 미소. 네 표정이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또, 그때만 볼 수 있는 네 표정마저 좋아져 버려서.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건 틀린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아이를 떠올리며 활짝 웃는 너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눈부셨다. 내가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한 건지 너와 나의 대화에서 그 아이가 차지하는 지분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너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이야길 할 수 있는지. 솔직히 잠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래도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유일한 상대는 나니까. 그런 조그만 사실들에 위로를 받으면서, 나는 사랑에 빠진 네 모습에 사랑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마침내 네가, 제일 먼저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그 아이를 내 앞에 데려왔을 때도 그저 웃는 얼굴로 잘 됐네, 하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그 아이가 미운 건 아니었다. 너의 그토록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도록 해 준 것에 오히려 감사했고, 그래서 괜찮았다.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어.

  그날 이후로 너와 나는, 아니 정확히는 나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져 갔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전과 같을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너와 같이 걸었던 학교 앞 담벼락 길도, 언제나 둘뿐이었던 넓은 도서실도, 점심시간에 잠깐 나누었던 대화들도 이제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었다. 그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그게 전부였다. 어쩌다가 시간이 맞아 너에게 말을 건네 봐도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너는 자리를 떴고, 동아리 활동이 내일로 바뀌었다고 알려주기 위해 너의 반을 찾아갔을 때도 넌 이미 그 아이와 집에 갔다고 말해 주던 네 친구만이 교실에 남아 있었다. 항상, 지금도 넌 나를 보면 환하게 웃어주었지만 조금씩 나를 멀리 하려 하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역시 거짓말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면서 나 자신을 설득시켰다.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은 될 수 없다고. 대부분의 동화는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입장에서지, 악역에게는 그저 불행한 이야기로 남을 뿐이다. 하다못해 백설공주 곁을 지키던 난쟁이라도, 유리 구두가 맞지 않았던 마을의 한 여자라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배역일지라도 누군가는 아파했고 누군가는 슬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나는 네가 주인공인 이야기에서, 있으나마나한 단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 다른 주인공이 네 곁을 떠나지 않는 한 나에게는 최소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고 난 그렇게 네 곁을 맴도는 것밖에 하지 못한 채로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게 분명했다. 너의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을 맞기 위해 밖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고,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내가 설 자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 좋아한다든지 싫어한다든지, 어딘가 허전하다든지 하는 건 전부 성급한 순간의 판단, 형체조차 없는 무언가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내가 내일 죽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내일 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무슨 수로 알겠어. 그러니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에 영원을 맹세하고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와 나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영화 속 배우들의 표정은, 어쩌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다. 오래 살아봐야 100년쯤 살다 가는 하찮은 존재가 입에 담기에 영원이라는 건 너무도 길고 무한한 시간이다. 누군가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사랑했다며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단지 사랑이 끝나기 전에 삶이 먼저 끝나버린 것뿐이다. 조금 더 살았다면, 아니 100년쯤 더 살았어도 변하지 않고 사랑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널 좋아하는 것도, 그 표정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도, 이 모든 것들로 인한 죄책감까지도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감정들이었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분명 그래야 하는데.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명확해져 가는 그 이유들이 그토록 뚜렷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따르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비참해 보였다. 의미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만 둬야지, 다짐하고 학교에 가도 네 맑은 눈을 보면 다시 좋아져 버리고. 집에 오면 또 다시, 이것도 다 오늘까지만이라고.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네 여전히 예쁜 웃음에 말을 잃어버리고. 아무리 그 웃음이 예의상 건네는 인사말이고 나를 향한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고 해도, 마냥 좋은 걸.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실은 내가 자각한 그 순간부터 너로 가득 찬 방 안에 나만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내가 좋아하는 다른 것들로, 다른 생각들로 내 주변을 채워 나가도 항상 그곳에는 배경처럼 네가 있어서,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생기기만 하면 너의 모든 것이 물밀 듯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곤 했다. 애초부터 내 의지대로 되어주지 않았던 그 공간에서 이제 와 내 의지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출구조차 찾지 못한 채로 어떤 죄책감에 휩싸여 끊임없이 벽을 쳐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너무 커버린 널 좋아한다는 감정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온 힘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 하고 벽에 주먹을 갖다 대는 어린 아이의 장난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너를 좋아하지 않겠다는 내 각오는.

  그렇게 혼란 속에서 지낸 지 한 달이 다 되어 갈쯤이었다. 종례가 끝나고 텅 빈 교실에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막 어깨에 매었을 때,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너를 보았다. 평소라면 그 아이와 같이 돌아갔을 텐데, 웬일이지? , 그 아이 과학 캠프 갔다고 했던가. 늘 하던 대로 태연하게 인사하려 했는데 잔뜩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네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너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내 앞에 멈춰 섰다. 네 진갈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네가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최근에 네가 나한테 잘못한 일이 있던가? 요즘엔 대화도 별로 못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너를 빤히 바라보자 너는 시선을 교실 바닥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들떠서 너한테 자랑한 거나... 상담해 달랍시고 그... 다른 얘기만 늘어놓은 거나... 전부.”

  아. 그건가. 어디서 듣고 온 거지, 그때 그 친구?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엄청 티 났을 텐데. 그것보다, 그럼 진짜로 몰랐던 거야? 아무리 둔하대도 그렇지 좀, 너무하네. 그렇다고 네가 사과해야 할 부분은 아니잖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 오히려 나를 대화 상대로 정해줬다는 것에 고마워했던 나였다. 네가 그걸로 미안해하면 내가 정말 나쁜 애가 된 것 같잖아. 어쩌면 네가 한 사과는 내가 널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히 욱해서, 지금까지 너에게 숨겨왔다는 약간의 죄책감, 그걸 내 입으로 직접 말해주지 못했다는 너에 대한, 혹은 나에 대한 미안함, 또 그로 인해 나만 언제까지고 괴로워야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까지. 터져 나오려 하는 감정들을 억누르려 했을 때는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좋아했어.”

  고개를 든 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치만 그냥 그뿐이야, 잠깐. 지금은 절대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지금 울고 싶은 건, 나란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한 때는 둘이서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교실에 새하얀 정적이 감돌았다. 시계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려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너는 다시 고개를 떨군 채 입을 꼭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네 목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었는데. 창밖을 붉게 물들여 가는 노을빛에 눈이 시렸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살짝 웃어보였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던지듯이 한 마디를 내뱉고서는 급하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 말하려 했다가는 그대로 네 앞에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달려 내려가는 계단이 자꾸 흐려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했다. 발소리도, 날 붙잡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너는 계속 그 교실에 서 있는 듯 했다. 저 멀리 정문이 보이는 1층까지 힘껏 달려 계단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상태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흘러내리는 눈물에, 숨을 참으면서 손등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눌러 댔다.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고, 그동안 해왔던 고민에 비해 지금 내 상황이 너무 바보 같아서 허탈했고, 그래서 더 눈물이 나왔다. 어쨌든, 금방 멈추진 않을 것 같았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내가 너한테 한 말들, 과거형으로 말했던 것까지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너를.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내 진심 따위, 너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잖아. 그동안 어렴풋이 다짐만 했던 일,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접어가면 될 거라는 안이한 생각, 전부 떨쳐버리고 이제는 정말 그만 두어야 한다. 너한테 그렇게 말했으니까,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신기한 건, 그동안 내 의지로는 출구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 방이 너의 미안해란 말 한 마디에 바깥쪽 벽부터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너져가는 벽 한 가운데에 네 이름을 크게 새겨놓아보았다. 무식하리만큼 큰 글씨였다. 내일부터는 꼭 너를 좋아하지 않기로. 왜냐하면 널 좋아하니까. 단역에 불과했던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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