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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차

[황흑] 끝나지 않는 여름, 그 안에서

* 타임 루프 소재입니다.
* 사망 소재.유혈 주의
* 배경은 테이코


01

  7월 11일 3시 40분.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까스로 내뱉으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한 걸음에 두 계단씩, 박차고 나갈 때마다 복도에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는 안 돼, 이번엔 제발-

  환한 빛이 한 줄기 새어나오는 옥상 문을 쾅-하고 열어젖히자 한여름 햇빛이 온 공간을 메워 눈이 부셔왔다. 반사적으로 잠시 감았다 뜬 눈. 흐릿한 시야 속에서 점점 선명해져가는 건 너무도 푸른 하늘, 그와 꼭 닮은 머리색을 가진 너의 뒷모습이었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너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수없이 창 밖에서 떨어지던 너. 틀림없이 너였어.


02

  7월 11일 3시 10분.

  캄캄한 어둠 속. 눈은 뜨지 않았지만 천천히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하나둘 들려온다. 교탁을 탁탁 치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밍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3시 10분, 수업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잠깐 잠들었나보네, 하고 칠판을 쳐다봤지만 나긋나긋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조금씩 감겨오는 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대로 푹 쓰러져서 한참을 잤던 것 같다. 별안간 쾅쾅-하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잠에서 깨고 나니 칠판을 손으로 두드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네-네- 죄송합니다. 안 잘게요, 안 자.

  속으로만 중얼거리고는 시큰둥하게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정말 쓸 데 없이 예쁜 하늘이네. 이런 날씨에 놀러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뭐하는 건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서, 정확히는 창 밖에서 무언가가 휙-하고 떨어진 건. 곧이어 들려온 '쿵-'하는 소리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방금 그건 뭐지? 누가? 도대체 왜?

  웅성웅성거리던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계단을 쭉 내려갔다.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서두르는 걸까, 왜 이렇게 울고 싶어지는 걸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꼭 깨문 채 네가 있을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원을 그리고 서서 수근거리고 있는 아이들, 심각한 표정으로 구급차를 부르는 선생님.

  "우리 학교에 저런 애가 있었나?"
  "어머... 어떡해...“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 틈을 비집고 한 걸음씩, 너에게로 다가갔다. 피로 붉게 물든 하늘색 머리카락이 얼핏 보인 것 같았다.


03

  캄캄한 어둠속. 눈은 뜨지 않았지만 천천히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하나둘 들려온다.

  잠시만, 여긴 어디?

  엎드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분명 나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이미 교실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3시 10분.

  그럼 그렇지, 누가 미쳤다고 학교에서 뛰어내리겠어.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꿈을 좀 깊게 꿨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책상위에 엎어졌다. 잠이나 더 자야지. 얼마나 지났을까, 쾅쾅-하는 소리에 다시 일어나니 선생님께서 칠판을 치면서 이 쪽을 노려보고 계셨다. 어라, 나 예지몽이라도 꾼 걸까. 꿈이랑 똑같은 걸? 꿈에선 이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혹시, 혹시나 정말 예지몽이라면 이제 곧-. 설마 하는 마음 반, 아니길 바라는 마음 반으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휙-. 연달아 들려오는 쿵-. 눈동자가 떨려왔다. 꿈에서랑 똑같아. 놀라서 뛰어나가는 선생님도 아이들도 다,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아. 한 번 더 아이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왠지 슬퍼지는 이 기분도, 똑같아. 두려운 마음에 조금 더 거칠게 아이들을 밀치고 너에게로 다가갔다. 피로 붉게 물든 하늘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시 캄캄한 어둠 속.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들리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이번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시계는 여전히 3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야, 꿈이야. 나도 참 많이 피곤했나보다.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꾸고. 애써 부정하고 아니라고 해봐도 그런 나를 비웃듯이 다시 휙- 그리고 쿵-.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아- 꿈이 아니구나. 너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다시 깨어나고 있었구나, 하고.

  계속, 너는 떨어졌다. 내가 한 번도 잠들지 않고 버티고 있어도, 창밖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 척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어도 너는 매번 위에서 아래로. 수업 내내 자면 괜찮은 걸까 하고 엎드려 봐도 네가 온 몸으로 차가운 땅에 부딪혀 내는 소리는 내 귀 속을 파고들었다.

  너를 멈출 순 없을까. 네가 떨어지는 시간, 항상 3시 50분이었다. 이번엔 네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하면 다시 교실에서 깨어난다. 한 번은 네가 떨어지고도 교실을 나가지 않았다. 온통 떠들썩한 학교를 외면하고 시계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교실에 나 혼자, 혹시 이러면 이 무의미한 반복을 끝낼 수 있을까 싶어서. 곧 시계가 4시를 가리켰고, 나는 어김없이 3시 10분의 교실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젠 너를 강하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마저 외워버린 것 같아. 너는 그동안 몇 번이나.

  분했다. 네가 뛰어내릴 거라는 걸 알고도 막을 수 없는 내가 싫었다. 넌 도대체 누구길래 날 이렇게도 슬프게 하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너무 무능해보여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선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어차피 이 반복되는 세계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네가 누군지만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잠깐만, 떨어지기 전에 찾으면 되는 거잖아?

  바보 같아. 이제서야 생각해 내다니. 네가 날 스쳐지나가버리기 전에, 이번엔 내가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네가 세상을 등지려고 마음먹기 전에, 내가 가서 붙잡겠다고. 이유는 알지 못해도 나라면 널 막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막연히 그런 확신이 들었다. 뒤로 돌아 3시 5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번만 지나면, 다시는 널 놓치지 않을 테니까.

  다시 눈을 뜬 3시 10분. 몇 번을 들어도 똑같은 아이들의 대화내용과 선생님의 교탁치는 소리. 이제 곧 만날 네가 답을 쥐고 있다면 이것도 마지막이겠지. 그런 희망에 부풀어 1분에도 몇 번씩 시계를 돌아보았다. 옥상, 분명 옥상일 거야. 너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30분, 아니 40분?

  째깍, 더디게 흐르는 초침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깜박 잠들었나보다. 양 볼을 탁탁 치며 급하게 쳐다본 시계는 45분. 괜찮아, 아직 충분해. 조용히 손을 들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후 서둘러 교실에서 나왔다. 옥상까지 가는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뛰어 내리지마? 한 번만 더 생각해? 옥상 문손잡이에 살짝, 오른손을 얹었다. 역시, 열려있었네. 살며시 문을 열었다. 끼이익--오래된 철문이 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에 펼쳐진 옥상,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어라, 옥상이 아닌 건가? 다른 층에 뛰어내릴만한 데가 있었나? 평소에 쓰지도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보려던 찰나에 울려 퍼지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소리. 아- 늦어버렸구나. 주저앉은 머리 위로 너의 향기가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너는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04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겨워. 몇 번째야 이거. 그만큼 너는 뛰어내렸고, 내가 막지 못해서. 그대로 엎드린 채 책상을 발로 힘껏 찼다. 신발 끝부터 저릿하게 전해져오는 통증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이를 악물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갔었다면 너는. 3시 40분, 교실을 나섰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까스로 내뱉으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한 걸음에 두 계단씩, 박차고 나갈 때마다 복도에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는 안 돼, 이번엔 제발-

  환한 빛이 한 줄기 새어나오는 옥상 문을 쾅-하고 열어젖히자 한여름 햇빛이 온 공간을 메워 눈이 부셔왔다. 반사적으로 잠시 감았다 뜬 눈. 흐릿한 시야 속에서 점점 선명해져가는 건 너무도 푸른 하늘, 그와 꼭 닮은 머리색을 가진 너의 뒷모습이었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너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수없이 창 밖에서 떨어지던 너. 틀림없이 너였어.

  나를 보는 눈동자가 잠시 떨리는가 싶더니, 은은한 미소가 너의 얼굴에 살며시 스며든다. 아아- 이제야 알겠네. 그토록 맑은 눈망울을 가진, 네가 누군지. 너의 말 하나하나, 손짓 하나하나가 그대로 기억에 남아서. 너를 바라보던 나의 표정, 마음까지 전부 천천히 되살아나 머릿속이 너의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새삼스레, 너는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네가 서있는 곳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너를 향한 생각들이, 너의 그 미소는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주면 좋겠다고 혼자 바랐던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밀려오는 너의 기억들을 뒤로한 채, 빠르게 창문 밖으로 떨어지던 너의 모습이 다시 되살아난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여전히 내 쪽을 보고 있는 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또 이대로 가버리지는 말아줘. 조심스레 뻗은 손으로 너의 양쪽 팔을 꽉 붙들었다. 아아, 환상이 아니야.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너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아왔을까. 끝없이 죽고 또 죽으면서 받은 아픔은 또 얼마만큼일까.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너의 곁에서 보냈으면서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너무 싫었다. 바보 같은 나는, 이제서야 네 곁을 지켜주겠다고. 더는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혼자 견뎌야만했던 그 고통을 다시 안겨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절대 못 보내.”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 변하지 않는 미소로 나를 보던 너는 네 팔을 잡고 있던 내 손을 살포시 잡아 내려놓았다. 손으로 전해지는 너의 온기와 함께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오랜만이네요, 키세 군.”

  그렇게 말하는 너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아니라고. 나는 네가 떨어지는 걸 몇 십번이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입을 열려던 나보다 먼저, 너는 말했다.

  “너의 세계에서 저는 몇 번이나 떨어졌습니까?”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어라? 네가 떨어지는 건 나한테만 반복되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한 번 죽고 나면 기억이 리셋 돼서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뛰어내린다든가. 그런데 지금 네 말대로라면 다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도, 네가 몇 번이나 떨어졌다는 것도. 그걸 알고 있는데 너는 왜 매번 뛰어내린 거지? 어째서 그런 의미 없는 반복을?

  “쿠로콧치, 지금 그게 무슨...?”

  너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가뿐히 난간 위로 한 발을 올렸다. 뒤이어 다른 쪽 발도. 이미 익숙해져서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 너의 표정에서는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따뜻한 바람을 느끼고 있던 너는 곧 천천히 몇 마디를 내뱉었다.

  “네가 먼저 수십 번을, 내 앞에서 죽어버렸으니까. 널 막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걸.”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죽었다고? 당황해하고 있는 그 잠깐동안 너는 한 발을 공중에, 너를 붙잡으려고 뻗은 손이 무색하게 곧바로 다른 발을 허공에. 너의 주위를 가르는 바람소리. 너는 또다시 저 밑으로 떨어져버린 걸. 차마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너를 바로 앞에서 또 놓쳤다는 사실, 그리고 네가 건넨 말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아서. 넋이 나간채로 바라보고 있던 옥상난간이 점점 흐려져 갔다.


05

  7월 11일 아침 8시.

  끈적끈적한 더운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유난히도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에 거슬리는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경쾌한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쿠로콧치---!”

  급하게 달려와 내 앞에서 멈춰선 너는 참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헥- 죄송함다! 어제 일 때문에 늦게 잤더니 늦잠 자버려서...”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뭐.”
  “으...정말 미안해여...”

  시무룩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게 훤히 보여서,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져 생각해보니 내 손이 닿을 수도 없는 높이더라. 그런 생각,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얼굴을 바싹 갖다 대는 너. 잠시만, 너무 가깝다고.

  “쿠로콧치,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키세 군은 키 커서 좋겠네요.”
  “갑자기?? 하지만 쿠로콧치 그렇게 작은 편도 아니고...”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본인 키나 보고 말씀하시죠.”
  “에...”

  얼굴 붉어진 거, 들키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댄 것도 모르겠지 너는.

  모델일하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그렇게도 들떠서 말하는 너에게 눈을 맞추며 걷다보니 어느 새 학교에 도착했다. 힘겹게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닫혀있는 교실 문 앞에 다다르자 싱긋 웃는 너.

  “쿠로콧치, 오늘도 좋은 하루!”

  아아, 정말. 창문 새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그렇게 말하는 너는 너무도 눈부셔서, 넋을 놓고 쳐다보던 사이 너는 복도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잠시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교실 안으로 급하게 걸어 들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서는, 아- 틀렸어. 이젠 정말 좋아져 버린 걸.

  여느 때와 똑같이 책을 읽고, 중간 중간 졸면서 수업을 들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놀랍도록 흐릿한 존재감은 이럴 때 편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역시 마음 한 편에는 누군가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그렇게 또 평범한 하루가 지나 가방을 맨 채 교실 문을 나서면 언제나처럼 네가 기다리고 있다. 이쪽을 보고 웃어주는 너는 나를 눈치채주는 유일한 사람,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

  어찌 그리도 할 얘기가 많은지 조잘조잘. 쉴 틈 없이 말하는 너를 보면 나도 같이 들떠버려서,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 날씨 너무 덥네요. 오늘은 재밌었어요? 뭐하고 지냈어요? 나를 향해 건네는 그런 작은 말들이 너무도 고마운 걸. 너에게 이 마음을 전하기엔 한참 서투른 나를 원망하면서 오늘도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다.

  뜨거운 햇볕아래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너와 함께 길을 걸어. 웃음이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 같은 그 길은 어느 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곁에 있고 싶은데. 하고 생각할 때쯤엔 이미 건널목 앞에 멈춰서있는 우리. 빨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너는 다시 이쪽을 바라본다.

  “그럼, 쿠로콧치! 내일봐요!”

  또 그렇게 나를 보고 웃어주고는 횡단보도 위로 한 발 내딛는 너. 아, 대답. 대답 못했는데. 벌써 길을 건너고 있는 너를 붙잡기엔 늦어버린 거겠지?

  끼익-

  분명 초록불이었다. 네가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을 때까지도. 사방으로 튀겨진 붉은 핏방울이 눈앞에서 천천히 번져갔다. 뭐야 이게. 뭐냐고. 기분 나쁘도록 끈적한 바람이 비릿한 피 냄새를 몰아온다. 산만하게 경적을 울리며 이리저리 멈춰 있는 차들 사이를 헤집고 한 걸음씩. 아니야, 아니지? 내가 잘못 봤길,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이끌고 너에게로 간다. 점점 가까워지는 너, 주변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검붉은 피. 조심스레 다가가 너를 품에 안아 올렸다. 희미한 온기가 느껴져. 붉은 빛으로 물든 너의 주위 풍경 속으로 내가 천천히 섞여 들어간다. 너를 차로 치어버리고 멈춘 그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은 상태였고 주위사람들은 119를 부르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야. 품안의 너는 이미 죽어버렸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너에게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붉은 피에 내 세상은 무너져 내려. 천천히 너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선명한 핏자국이 남는다.

  안 돼. 안 된다고. 아직 인사도 못했는데. 하고 싶었던, 해야 했던 말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너의 그 모습들이 나를 웃게 했다고. 단지 멋쩍음에 건네지 못하고 언젠가, 언젠가는 하면서 미뤄왔던 말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포시 쓰다듬는 손에 간지러운 따스함이 느껴진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나와서 전 신호를 건넜다면 괜찮았을까. 내가 인사한답시고 너를 잡았다면 너는 죽지 않았을까.

  미안해. 내가 널 지켰어야 하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나와는 다르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모두에게 소중한 아이였다, 너는. 꼭 감은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눈을 뜨자 네 모습이 방울방울져 떨어진다. 살아줘. 살려줘. 너는 이대로 죽어서는 안 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니까 아직 죽어서는 안 돼. 네가 살아있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시 돌아와 줘. 지금까지 못 했던 말들 제대로 다 할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없던 일로 하면 안 될까? 다시 멀쩡하게 일어나서 그 예쁜 얼굴로 웃어주면 안 돼? 한 번만. 한 번만 살아줘, 제발. 눈물범벅 피범벅, 잔뜩 엉망이 되어버린 채로 품안의 너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너의 모습이 조금씩 커지는 사이렌소리와 함께 흐려져 갔다.


06

  살며시 뜬 눈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교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반 아이들의 뒷모습이 점점 선명해진다. 자세를 보니 아마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들었나보다.

  그러니까, 꿈인 거지? 시계는 3시를 가리켰다. 지금이 수학 시간이니까 틀림없이 7월 11일. 네가 죽은 건 그저 꿈속일 뿐이라는 안도감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다행이야. 오늘은 운이 나쁘려나,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조금 찝찝해도 네가 죽지 않았다면 그걸로 됐어.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고는 서랍에서 책을 꺼내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평범한 일상, 그래도 네가 있기에 좋은.

  수업이 끝난 교실, 문 밖에 서 있는 너에게 이번엔 내가 먼저 웃어 보인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하는 생각도 잠시. 네가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꿈속과 똑같았다. 중간 중간 표정이나 손짓, 한숨소리까지도. 설마 예지몽이라든가.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해.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였는지 네가 나에게 물어 온다.

  “쿠로콧치,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안색 되게 안 좋아 보이는데.”

  아, 이런 말은 한 적 없었지? 거 봐, 아니라니까. 어쨌든 본인이 죽는 꿈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뭐 그럼 다행이구요!”

  언제나처럼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너를 바라본다. 생긋 웃는 표정으로 이쪽을 마주 바라보던 너는 같은 인사를 건넨다.

  “그럼, 쿠로콧치! 내일 봐요!”

  평소와 같이 걸어가는 네 뒷모습이 갑자기 불안해 보여서, 꿈속과 겹쳐 보여서. 이번엔 꼭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에 너를 불러 세웠다. 네가 뒤돌아보던 그 순간에,

  끼익-

  소름끼치는 소리가 너를 치고서는 내게로 와 온 몸을 타고 돈다. 비릿한 피 냄새, 웅성거리는 주위. 잠시 넋이 나가 바라보고 있자면 여기저기 멈춰 서서는 경적을 울리는 차들. 울렁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한 걸음씩 너에게로. 네 곁에 앉아서 웃고 있는 듯한 너의 얼굴에  떨리는 나의 손을 살짝 대 보았다. 너를 차로 들이받고 주저앉은 사람은 그 때 그 사람, 또 다시 피범벅이 되어 죽어버린 너. 꿈속과 다른 거라곤 네가 내 안부를 묻던 그 한 마디, 널 보내지 않고 불러 세운 나, 그것뿐.

  나 때문이야. 내가 괜히 불러 세워서 네가. 이번엔 아무리 봐도 나 때문이라고. 한 번 생각해버린 이상 자책에는 끝이 없어서, 널 부르지만 않았어도, 너랑 같이 오지만 않았어도. 아니, 애초에 너랑 모르는 사이였다면 네가 죽을 일은 없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목을 조여 왔다. 서러운 듯 울어대는 내 울음소리 사이사이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 어떡해야 해? 이것도 꿈이야?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꿈이라고 해줘. 그게 아니라면 일어나서 장난이라고 말해줘. 화내지 않을 테니까, 제발. 눈물로 흐려지는 너의 모습이 내 안을 가득 채우다 천천히 사라져 갔다.

  다시 캄캄한 어둠속,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뜬 그 앞에 네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숨을 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 때 들려오는 학교종소리. 어라? 종소리? 번쩍 눈을 떠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3시? 아니, 그전에 여기 교실이잖아? 분명 네 곁에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또 똑같은 풍경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생님이 들어와서 하신 얘기, 아이들의 반응도 전부 네가 죽기 전 3시와 같았다. 설마 또 꿈인 건가? 팔 안쪽을 있는 힘껏 꼬집어봤다. 바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버렸다. 그럼 이걸로 벌써 세 번째, 반복되고 있다는 건가. 어째서? 네가 왜 계속 죽어야 하는 거지? 수업 내내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직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수업이 끝나버렸고, 아이들은 네가 죽기 전과 똑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가방끈을 잡으려 뻗은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너는 다르게 말해달라고, 그저 꿈이었을 뿐이라고 확인시켜 달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살며시 교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너는, 다시 웃어주었다.

  “아- 오늘 날씨 너무 덥네요.”

  제발 그만. 똑같은 말은 이제 그만해 줘. 더 이상 네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너는 쉬지 않고 전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면,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현실이라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너를 살릴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와 점점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네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춰왔다.

  “쿠로콧치, 무슨 일 있어요?”

  그래, 이건 처음이랑 달랐던 네 말. 반복되고 있는 거라고 해도 내가 다르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우선 그 때 그 사람이 운전하던 차. 그것만 피하면.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너의 옷깃을 잡아끌며 말했다.

  “키세 군, 오늘은 저 길로 돌아서 가지 않겠습니까?”
  “뭐, 딱히 상관은 없지만. 갑자기 왜요?”
  “그냥... 그런 게 있습니다.”

  에에- 뭐예요? 저한테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거? 그렇게 말하고는 장난스럽게 웃는 너를 보니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봐, 할 수 있어. 바꾸면 되는 거잖아? 익숙하지 않은 길을 따라 걷고, 조금 달라진 너의 얘기를 들으면서 여느 때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 집을 돌아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저 멀리 건널목이 보였다. 마음 같아선 건너지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건널목을 지나지 않고 네 집까지 갈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여태까지와 다른 횡단보도 앞으로 널 데리고 오는 것, 그 뿐이었다. 적어도 그 때 그 자동차가 같은 시간대에 이 앞을 지나갈 일은 없겠지.

  “그럼, 쿠로콧치! 내일봐요!”

  평소와 다른 풍경을 등지고 나에게 웃어주는 네 모습이 왠지 색다르게 느껴졌다. 분명 같은 웃음일 텐데,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길을 건너가는 너를 부르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내가 그 때 불러 세웠기 때문에 네가 죽은 거니까. 같은 실수는 두 번 하지 말자. 속으로 되뇌면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 마음과는 달리 너무도 경쾌한 너의 발걸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또 그 순간에.

  끼익-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풍경이 눈앞에서 울렁거렸다. 아니, 왜? 이럴 리가 없는데? 너를 친 자동차 쪽으로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브레이크 고장인가. 당황해 허둥지둥 대는 모습은 비슷했지만, 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끈적한 피비린내가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듯 했다.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주위에서 너만이 반짝였다. 붉게 물들어가는 너의 샛노란 머리카락이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다가가지 않았다. 아니,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웃고 있었을 네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난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왜 네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막지 못했을까. 지금까지 네가 내 곁을 지켜준 만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오래 네 곁에 머물고 싶을 뿐인데. 계속 반복되는 이 상황을, 그래. 딱 한 번만 바꾸면 되는 일인데. 난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거야?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은 보도블록 위에서 눌러 담다 못해 흘러넘쳐버린 눈물이 천천히 번져갔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내가 너를 구해내 보일 테니까. 방울방울져 무너져 내리는 너의 모습이 점점 커지는 사이렌 소리에 묻혀갔다.


07

  마치 꿈에서 깨듯,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이대로 눈을 뜨면 모든 일이 한낱 꿈처럼 사라져버리기를. 바보 같은 소원은 익숙한 종소리에 흩어져버렸다. 바라본 시계는 다시 3시. 그렇다면 이제 받아들일 수밖에. 널 살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보자. 일단 죽는 장소나 가해자가 항상 같은 건 아니다. 세 번, 공통점은 교통사고였다는 것. 그것도 초록불이 켜져 있는 횡단보도 한 가운데서. 그럼 건널목만 피하면 되는 건가? 우선은 하나씩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오늘따라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게 흐르는지. 초조함이 앞서 책에 쓰여 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끝나는 종이 치고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방을 매고 교실 문을 나섰다. 눈앞에 서 있는 건, 또 너.

  “늘 저보다 먼저 와 있네요. 수업은 제대로 듣고 있는 겁니까?”
  “그거야 저희 선생님이 워낙 말씀 짧게 하시는 걸로 유명하잖슴까! 쿠로콧치는 그 반대구요.”

  이래봬도 수업은 안 빠진다구요? 모델 일 있을 땐 뭐... 종종 빠지긴 하지만요. 중얼중얼 말하며 걸어가는 너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끌었다.

  “키세 군. 그... 혹시 오늘 특별한 일 없으면 같이 저희 집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에? 뭐 별 일 없긴 한데... 갑자기 왜요?”
  “저번에 보고 싶다고 하셨던 NBA잡지를 어제 집정리 하다가 발견했습니다. 괜찮으면 오늘 보여드릴까 해서.”
  “정말요? 그럼 당연히 가야죠! 아, 그럼 바닐라 쉐이크라도 사갈까요?”
  “아니요. 어디 들리지 말고 곧장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집에 초대해주는 건 좋지만요, 오늘 쿠로콧치 뭔가 조금 이상하네요. 나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어딘가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네 시선에 눈을 맞춰 보았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생긋 웃어주는 그 따스함에 잠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내 빵-하고 울리는 경적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맞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신호등을 앞에 두고 건너지 않은 채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길이지만 오늘은 너와 함께. 네가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던 그 건널목이 멀어져 갈수록,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 할 수 있어. 일단 이대로 우리집까지만 가면, 괜찮을 거야. 도로변에서 어떤 차가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끼익-

  분명 내 옆에 서 있던 네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 더듬던 시선 끝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네가 있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헛구역질이 일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건널목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두려움이 슬픔을 집어삼켜버린 건지 눈물도 나오지 않아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내 잘못이야? 그냥 널 보내면 되는 거였는데 괜히 이 길로 널 데려와서? 머릿속이 새하얘져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다시 웃는 너를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눈을 떴다. 시계는 다시 3시. 이번엔 어떻게 해야 할까. 건널목은 더 이상 공통점이 될 수 없었다. 그럼 남은 건, 교통사고라는 것. 일단 학교 밖으로 안 나가면 차에 치일 일은 없겠지. 몇 시간 정도만 학교에서 버텨보자. 그 시간대만 피하면 괜찮지 않을까. 수업이 끝나고, 교실 밖에 서 있는 너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키세 군, 저 지금부터 슛 연습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근데 오늘 체육관 공사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농구부 연습도 없다고 아카싯치가...”
  “제2체육관도 있으니까요. 거기서 하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아, 그럼 갈까요?”

  오랜만에 잡아본 농구공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땀이 흥건히 배여 몇 번이고 고쳐 잡는 공을, 너는 바라보고 있었다. 자, 쿠로콧치. 어서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네 뒤에 있는 골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백보드에 가 부딪힌 공은 링을 따라 돌다가 이내 튕겨져 나왔다. 튀는 농구공소리가 텅 빈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아, 거의 들어갈 뻔했는데. 한 번만 다시 던져볼래요? 네 표정처럼 상냥한 말투에 너는 거짓말은 잘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네가 던져주는 공을 두 손으로 받아냈다. 살짝 곁눈질로 시계를 쳐다봤다. 10분, 10분이면 네가 죽었던 그 횡단보도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이다. 그만큼만 여기서 버티면. 다시금 그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초조해졌다. 몇 번을 골대를 향해 공을 던져도 들어갈 리가 없었다. 계속 지켜보며 격려해주던 너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게 아니구요, 이렇게. 조금 더 위로 던져 봐요. 너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공을 던졌다. 공은 곧바로 골대에 들어갔고, 너는 작게 웃으며 주먹을 쥐어보였다.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농구. 너는 언제나 빛나고 있었지만 농구를 하고 있을 때면 특히 더 그랬다. 다른 스포츠는 쉽게 해내버려서 재미없다고 투덜대던 네가 어째서 농구에 빠져버렸는지, 그 재미를 아는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통통 튀는 농구공 소리, 바닥에 끌리는 농구화 소리, 깨끗하게 골대에 들어가는 공의 모습까지. 모든 게 좋아서 농구를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너도 내 곁에 있었다.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너는 신이 나서는 나를 돌아봤다. 쿠로콧치, 봤어요? 너는 공을 주워 내 손에 쥐여 주고는 그대로 두 손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봐요, 이렇게 팔을 좀 더 들어 올리면. 손에서 떠나간 공은 깔끔히 골대를 통과했다. 너는 환하게 웃더니 골대 밑으로 달려가 굴러가는 공을 튀겨 나에게 던져주었다. 이제 할 수 있겠죠? 백보드만 제대로 맞춰도 대부분 들어가니까요. 한 번 더 던져볼래요? 공을 받아들고서 시선을 골대로 옮겼다. 뒤에 있던 시계는 10분이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좋아, 이걸로 끝인 건가.

  탁-

  공이 링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무언가가 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체육관 가득 울려 퍼졌다. 이건 또 뭐야.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지, 그런 거지? 힘이 풀려버린 다리로 한 걸음씩 너에게로 걸어갔다. 네 옆에는 깨진 체육관 조명이 있었고, 피 묻은 농구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네 볼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지만, 조용한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두근대던 심장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쓰러진 네 모습이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농구공과, 골대와, 그 체육관과 함께였기에 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울진 눈물이 네 하얀 셔츠 위에 하나둘씩 새겨졌다. 이젠 정말 희망이 없어 보였다. 너의 죽음의 원인은 건널목도, 자동차도 아니었다.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너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난 막을 수 없었다. 그 사실 하나가 내 무능함을 증명해 주는 듯 했다. 이제 나도 모르겠어. 왜 하필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또, 뭘 어떻게 해야 해? 꽉 쥐고 있던 네 교복 셔츠 깃이 눈물에 번져 조금씩 흐려져 갔다.


08

  눈을 뜨는 시각은 항상 7월 11일 3시였다. 같은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네가 체육관에서 죽은 이후로는 정말 별의 별 짓을 다 해봤다. 집에 가려는 너를 붙잡고 교실에도 있어봤고, 읽고 싶은 책이 있다고 도서실에, 음료수를 사러 편의점에 가서 버텨도 봤다. 그때마다 너는 날아오는 공에 맞아서, 넘어진 책장에 깔려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편의점 유리를 깨고 들어오는 바람에 죽어버렸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너는 더 하찮은 이유로 죽어갔고, 허탈해서 빈 웃음이 새어나오는 날들이 늘어갔다. 분명 죽을 일이 아닌데도 매번 그토록 쉽게 죽어버리는 네 모습은 마치 어떻게든 죽으려고 애쓰는 사람 같았다.

  한 번은 택시도 타 봤다. 택시기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사고가 나면 어차피 다 같이 죽지 않을까하고. 다리가 아파서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며 칭얼거리는 나를 보고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업어줄까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어오던 너에게 오늘은 왠지 택시를 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고집을 피웠더랬다. 고개를 끄덕여준 너와 함께 교문에서 조금 걸어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시계를 쳐다봤다. 늘어나는 미터기 숫자와 째깍거리는 시계초침이 숨통을 조여와 가슴이 답답했다. 옆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던 너의 손을 꽉 쥐었다. 이번엔, 나도 함께니까. 너는 잠깐 놀라는 듯싶더니 이내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쾅-

  얌전히 옆에서 달리고 있던 차가 갑자기 네가 앉아 있던 왼쪽 좌석을 들이받았다. 순간 온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가 운전석 뒤 가림막에 머리를 부딪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게, 난 아무래도 죽지는 못한 것 같았다. 간신히 실눈을 뜨고 네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앉아 있는 네가 찌그러진 차체와 함께 어른거렸다. 깨진 유리창 조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있는 너를 보고 있자니, 두 눈이 조금씩 시려왔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몇 명이 같이 있어도 결국엔 너만 죽게 되는 거야. 그렇지만 왜?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너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고, 눈을 떴을 땐 다시 7월 11일 3시였다.

  더 이상은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보다 먼저 죽기로 했다. 처음엔 바보 같은 소리라고, 나도 생각했다. 그랬는데 정말 웃기게도, 한 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다음부터는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이 반복이 끝나버린다면. 갑자기 끝나서 네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장난을 시작한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존재한테는 충분히 그렇게 해버릴 만한 잔인함이 있고도 남을 터였다. 만약 네가 죽고 없어진다면, 나 혼자  살아있을 자신이 없다. 내 앞에서 네가 죽는 걸 수없이 봤으면서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짓누를 게 분명했고, 날 유일하게 알아주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이유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반복을 계속해낼 여력이 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너를 살리려고 온갖 수를 다 써보는 동안 너와 나만 갇혀버린 듯한 이 세계를 끝내버릴 다른 방법은 없을지 수천 번을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아주 옛날 집에서 봤던 영화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꿈속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어야한다는 이야기. 예를 들면 높은 데서 뛰어내린다든가, 옆에서 폭탄이 터진다든가. 장소를 바꾸는 조그만 변화 가지고는 절대 그 세상을 깨부술 수 없었다. 너는 매번 다시 살아올 때마다 그 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마 꿈을 꾸고 있는 건 나. 그러니까 변해야하는 건 나 자신이었고, 그래서 죽기로 했다. 내가 여기서 죽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제일 좋은 결론이겠고, 진짜 죽어 버린다 해도 네가 없는 곳에선 어차피 살아갈 생각도 없었고 어쩌면 이걸로 네가 더 이상 죽지 않을 수도 있겠고. 밑져야 본전이지. 안 그래?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뜬 3시였다. 지겹도록 반복해서 들은 선생님의 말씀과 아이들 잡담소리는 이미 외워 버린 지 오래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을 꺼내들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결말은 보고 가야지. 책 속 주인공은 불행한 가정, 마음대로 안 되는 인간관계, 이룰 수 없는 꿈 등 온갖 고난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힘없이 걸어 나간 횡단보도에서 달려오는 트럭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흔히 있는 열린 결말. 주인공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살았다면 그 뒤로 행복했을지 여전히 불행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다. 뒤표지를 덮고 나니 알 수 없는 허무감에 휩싸여 머릿속이 멍했다. 이래서 열린 결말은 맘에 들지 않는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속 시원한 해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3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뒤로한 채 화장실에 가겠다 말하고 교실을 나섰다.

  옥상문은 열려 있었다.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자 끼익-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옥상과 그 아래 펼쳐진 풍경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텅 빈 옥상에 덩그러니 놓여 진 나무벤치가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털썩 걸터앉아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색 도화지에 하얀 페인트를 칠하면 이런 색일까. 너무도 선명한 색깔에 괜스레 눈이 시려왔다. 내가 죽어도 넌 모르겠지. 네가 내 앞에서 몇 번이고 죽은 것도, 널 살리겠다고 온갖 무모한 짓 다 했던 것도 넌 모른 채로 그냥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려나. 실은 너를 구할 방법 중 하나로 너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하는 것도 생각해 봤었다. 네가 벌써 몇 번째 내 앞에서 죽었고, 지금 이건 나에게 몇 번째 반복되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어째선지 이 말만 꺼내려 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너한테 이걸 얘기한다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언제 죽을지 아는 채로, 안절부절 하다가 너는 또 죽어가겠지. 네가 더 고통 받을 뿐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네 사물함 안에 작은 메모라도 남기고 올 걸 그랬나. 너를 위해 내가 이렇게까지 했다고, 너는 그만큼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적어도 너한텐 알려주고 싶었는데. 이제와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네.

  내가 죽어도 네가 슬퍼하는 건 한 순간이겠지. 어쩌면 그게 내가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너와 같이 원래 살던 삶을 사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나 같은 건 처음부터 없던 셈 치고 네가 잘 살아가길 원한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나, 아니 너한테만 이런 일이 생긴 건 모두 내가 죽은 널 살려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에, 그 전에 널 불러 세우지 못한 것, 그 이전에 널 만난 것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나였고,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옥상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쇠로 된 난간 위에 한 발을 올리고 두 손으로 난간을 짚어 나머지 발도 난간 위에 올렸다. 난간은 생각보다 낮았다. 높아서 올라가지 못하면 어떻게 죽어야하지, 하고 다른 방법을 고민했던 건 부질없는 걱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열려 있는 옥상 문, 낮은 옥상 난간. 여태 떨어진 사람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두 발이 놓여 져 있는 난간은 오히려 넓어서, 위태롭게 서 있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려던 계획은 실행하지 못할 것 같다. 그나마 두려움이 덜한 방법일 거라 생각했는데. 앞으로 엎어져야 하나. 다리부터 떨어질까, 머리부터 떨어질까. 다리부터 바닥에 부딪치면 다리만 산산조각 나고 안 죽는 건 아닐까. 아니, 공중에 뜨면 어차피 무거운 머리가 밑으로 내려가려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무섭지 않으니까, 이게 맞는 거니까 울지 않으려 했는데. 마음이 머리를 따라 주지 않았다. 집에 있을 가족들이, 서랍 안 속 깊숙이 넣어둔 쓰다만 편지가,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남겨둔 미련들이 차례차례 떠올라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을 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네 모습이 그려졌다. 이제 더는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네 목소리를, 웃음을, 눈을, 기억하고 싶은 너의 모든 것을 되살려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웃는 너를, 그 옆에서 웃는 나를 나에게 돌려주기를.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무게중심이 머리로 쏠려 떨어져버릴 때까지 계속,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강한 바람소리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눈을 뜬 곳은 다시 3시의 교실이었다. 선생님의 수업내용, 아이들의 대화내용은 여전히 7월 11일, 그 날과 같았다. 드디어 진짜 7월 11일인건가? 네가 죽지 않는, 진짜 세계로 돌아온 거야. 그렇지? 들뜬 마음으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이미 외워버린 수업 내용은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찬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태어난 이래 가장 반짝이는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동안 무시했던 것들, 날 성가시게 하던 것들,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열중해 있었더니 어느새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인사를 마치자마자 교실을 나섰다. 문 앞에는 환하게 웃는 네가 서 있었다. 나, 실은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어. 금방이라도 달려가 네 팔을 붙잡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내 웃어보였다. 너는 모를 테니까. 이제 다 해결 됐으니까 모르는 게 낫겠지. 너랑 같이 하굣길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네가 건네는 말은 수십 번 반복되던 그것과 같았으나 모두 그쪽 세계의 너였고 지금의 네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네가 평소에 하던 인사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걸어서 그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초록불이 켜지자 너는 또 웃으면서,

  “그럼, 쿠로콧치! 내일봐요!”

  네가 한 발, 내딛기 무섭게 저쪽에서 달려오던 차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너를 들이받았다. 몇 번이고 맡아왔던 피비린내가 다시 코를 찔렀다. 뭐야, 이게. 아직 안 끝난 거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내가 죽든, 죽지 않든 네가 계속 죽는 거. 결국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입에서는 짧은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탈해 주저앉은 내 옆에서 너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여기서 떨어져도, 나는 죽지 않아. 그러니까 계속, 네가 죽기 전에 내가 떨어질게. 그럼 너는 아직 죽지 않은 채로 다시 새로운 7월 11일에서 눈을 뜨는 거야. 어때, 괜찮은 생각이지? 왜 그러고 있어, 뭐라고 말 좀 해봐. 대답 없는 네 모습이 멀리 사이렌 소리와 함께 흐려졌다.


09

  “여기까지가 제 이야깁니다.”

  말을 마친 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벤치에서 일어섰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겪고 있었고, 무엇보다 너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정작 본인은 눈치 못 채고 있겠지만, 아닌 척 하고 있어도 표정에 훤히 다 드러나는 네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서 나갈 수는 있는 걸까. 네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나가지 못했던 거잖아. 그동안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는 네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내가 죽은 것, 결국 내 잘못인 걸. 내가 죽어서, 나 하나 살리겠다고 죽는 걸 몇 번이나 보고, 또 네가 몇 번이나 죽고. 벤치 위 놓여 진 두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한심하고, 또 분했다. 난간 가까이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네 쪽으로 다가갔다. 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키세 군이랑 대화해서 좋네요. 처음엔 많이 했는데, 제가 죽기 시작하니까 만날 수가 없더라구요.”

  네가 난간 위로 왼 발을 디뎠다.

  “이제 그만 해요. 떨어지는 거, 무섭잖아.”
  “벌써 몇 번을 했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른 방법, 찾아보는 게 어때요?”
  “웬만한 건 이미 다 해봤는걸요.”

  솔직히 다른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네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너는 그런 내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쪽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괜찮습니다. 네가 죽는 걸 보고 있을 바에야 제가 죽는 게 나아요.”

  그래도. 네가 날 계속 살렸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할 순 없잖아. 나도 똑같은 걸. 네가 죽는 것보다야 내가 죽는 게 나아. 아, 그러고 보니까,

  “지금까진 내가 몰랐잖아요. 이제 내가 알게 됐으니까, 뭔가 변화가 생기는 거 아니에요? 하지 마요. 진짜 죽을 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난간 위에 서 있는 네 옆에 나도 살짝 올라섰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서 네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너는 크게 숨을 들이 마시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지금 제가 여기서 떨어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죽을 테고, 거기서 끝이란 소리잖아요? 그렇다면 더더욱.”
  “왜 반대로는 생각 안 해요. 나도 더 이상 쿠로콧치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다구요.”

  너는 어딘가 쓰라림이 묻어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내 눈을 쳐다봤다.

  “이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네가 계속 살 수 있다면 전 그걸로 됐어요.”

  햇볕은 따가웠고 바람은 시원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바람보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네가,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 해야만 하는 걸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유를 알아내기도 전에 이미 그 무언가는 우리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피할 길은 없었다. 억울하지만 이게 우리한테 벌어진 일이었고, 분하지만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눈을 감고 들이마신 습한 공기가 온몸을 타고 돌았다. 내 손을 잡은 너의 손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두려워하고 있겠지. 자신이 죽을 걸 알고도 몸을 던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너는 또 매번, 어떤 마음이었을까. 따뜻한 체온이 잡은 두 손을 타고 흘러 넘쳤다. 긴 침묵을 깨고 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네요. 그럼 이만.”

  너는 잡았던 손을 놓고서는 두 발을 공중으로 내딛었다. 아니, 가긴 어딜 가. 떨어지려는 네 팔을 재빨리 잡아당겨 너를 품에 안았다. 바람소리가 강하게 귓전을 때렸다. 넌 네가 없어도 내가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보지만, 어차피 네가 없는 곳에선 살아갈 의미가 없는 걸. 무얼 위해 살겠어, 내가, 그 눈부신 미소를 가진 네가 없는데.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무서웠지만 괜찮았다. 같이 있으니까. 내 등이 먼저 땅에 닿도록 몸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적어도 너만 죽을 일은 이제 없어. 앞으로는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그 엄청난 고민과 아픔을 혼자 겪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네 눈이 닿아있는 내 교복 와이셔츠가 흥건히 젖었다. 울고 있는 걸까. 두 눈을 질끈 감고 네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끝나있기를. 그저 바랄 뿐이었다.


10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러니까 여긴 분명, 우리집. 잘 떠지지 않는 눈, 오른쪽 손으로 옆을 더듬어 알람시계를 집어 들었다. 7시, 7월 11일. 그렇다면 이번엔 정말 7월 11일 아침인거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것도 그 날 아침의 반복인지 판단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되어버린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해왔던 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파란 하늘에, 홀린 듯 정신을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하얀 구름이 가볍게 떠 있었고 멀리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웃으며 통화를 하는 사람이 반대쪽에서 걸어와 내 곁을 지나쳐갔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은, 평범한 아침의 등굣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세계가 단지 내 꿈이었을 뿐이란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그래, 그냥 꿈이었던거야. 정말 생생한 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잖아?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너와 매번 만나던 장소로 향했다. 그런 꿈도 꾸고 했으니, 오늘은 퉁명스럽게 대하지 말고 먼저 밝게 웃어줘 볼까. 골목을 돌아 나오자 저 멀리 네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라, 평소라면 내가 먼저 도착했어야하는데. 내가 늦게 나왔나? 시계를 확인하니 7시 30분,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갑자기 불안, 두려움,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억지로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내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너에게로 다가갔다. 심각한 표정을 하며 앞을 바라보고 있는 너를 부르려 했을 때 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표정이, 모든 게 꿈이었길 바란 내 기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려버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의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살짝 쓴 미소. 솔직히 두려움과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혼자만이 아는 진실은 아무리 외쳐 봐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로 인한 고립, 좌절, 포기.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그 모든 건 없어질 수 있을 터였고, 그런 네가 내 곁에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설령 다시 죽어야 한다 해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너는 평소와 다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옆에서 걸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살짝 미소를 띤 얼굴, 전에 없던 기나긴 침묵이었지만 어째선지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함마저 느껴졌고, 무더운 날씨였지만, 싫지 않았다. 너를 의식하고 있어서일까, 네 숨소리를 제외한 주위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등굣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나무에서 나뭇잎 몇 개가 살랑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운 일상에 코끝이 간질거렸다. 걸음은 계속 원래 걷던 길을 따라서, 어느새 교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너는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면서,

  “쿠로콧치, 오늘도 좋은 하루!”

  나를 향해 한 번 웃어주고는 네 교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에 안심하고서 눈앞의 교실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으니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서랍 안으로 손을 뻗어 봤다. 그때 그 책.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진한 검정색 표지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 주인공, 거기서 피하거나 가만히 서있거나 어쨌든 무언가 선택을 했겠지. 죽었든지 살았든지 전보다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칠판 위 글씨를 옮겨 적은 내 글씨가 오늘따라 더 맘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의 버릇이나 손동작, 말투 같은 자잘한 것만 한참을 관찰하면서 앉아있었고 빽빽하게 들어찬 책 속 글자를 바라보다가 깜빡 졸기도 했다. 끝나는 종이 치자마자 가방을 챙겨 놓고서 선생님 말씀이 빨리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그 내용은 확실히, 그날과 같았다. 반 아이들이 모두 나간 후,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교실 밖으로 나섰다. 제발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문 앞에 서있던 너는 또 옅게 웃어주었다.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괜히 울어버릴 것 같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평소에도 먼저 말을 걸어주던 건 너였으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한 너, 좀처럼 볼 수 없던 표정에 문득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질 뿐이었다. 너는  왜 뛰어내리는 나를 품에 안았을까. 죽으면 어쩌려고. 그럼 나는 왜 뛰어내렸던가, 죽으면 어쩌려고. 아마도 나한텐 네가 나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또는 그냥 네가 죽지 않길 바랐으니까. 너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런 쓸 데 없는 궁금증.

  어느새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저 멀리 신호등이 보일 때부터 눈앞이 울렁거리는 듯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딛었다. 멈춰 서서는 네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하던 그 얼굴을 나에게 돌려, 웃으면서 너는 말했다.

  “우리 잠깐만 이대로 있을까요?”

  그 표정을 보고 어느 누가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고선 초록색으로 바뀌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 차도 지나가지 않았고, 차에 치인 사람도 없었다. 너와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신호가 초록 불, 빨간 불로 바뀌는 걸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다섯 번쯤 차들이 멈추고 다시 움직였을 때 너는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야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너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리고 또 같은 인사.

  “그럼, 쿠로콧치! 내일 봐요!”

  너는 두려움을 감추려고 일부러 더 밝게 말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게 나한테는 또 너무 불안해서. 이번에는 꼭 대답하겠다고 결심하고 아직 발을 떼기도 전인 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너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꼭. 내일 꼭 봐요, 키세 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막상 잡고 나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너는 내 손을 따뜻한 너의 두 손으로 감싸고서 말했다.

  “걱정 마요, 이제 아무데도 안 가.”

  너의 그 말에 갑자기 모든 걱정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야. 너는 내 손을 살며시 내려놓고 횡단보도로 걸음을 옮겼다.

  눈을 떴을 때는 7월 12일, 너에게서 온 문자.

  [12일이네요. 문자보면 바로 답장 줘요!]

  한여름, 우리들의 악몽은 그렇게 끝을 보이고 있었다.